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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살아요!!/이런저런 말말말

나의 어린 과외선생님 - 꽁보리밥과 풋고추에 대한 추억


내가 어릴적 국민학교때만 한 두차례정도 과외공부란걸 한것같다.
국민학교 3학년쯤 할머니가 가라는 과외집은 어린내가 걷기에는 조금은 먼 집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전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어려서 나는 늘 몸이 약해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달고 사는 아이였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하게 건강해지고 듬직해졌지만 말이다.
게다가 편도와 기관지도 안좋아 감기종류는 늘 달고 사는데다 구강염에 혓바늘등이 끊이지않아
음식을 먹을때마다 곤욕스러워 쓰쓰 소리를 내며 먹던가 혓바닥을 내밀고 숟가락을 얹어 최대한
아픈 부위에 입식물이 닿지않도록 노력을 하고 먹었기때문에 김치는 커서까지 별로 먹어본 기억이 없고
반찬이 없을때는 최소 라면을 먹던지 마아가린에 케챱을 비벼먹는 그런식성이었다.
어쩌다 아픈부위에 고추가루 하나만 닿아도 죽을정도로 쓰라렸으니 별 방법이 없었다.
새끼손톱만하게 구멍이 뚫린 염증이 입속에 대여섯개가 되면 말 다했지 않은가.
혓바늘 하나에도 절절매본 경험이 있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것이다.
서울대학병원에 내 특별챠트가 있었을정도이고  3학년때부터 5학년때까지 한두달에 한번서울로 상경해가며
치료를 받고 하루에 비타민C를 비롯해 먹는 약 종류만 30알이 넘어 제발 주사맞게 해달라고 빌정도 였고
혀를 떼어내어 설암 조직검사까지 받았었다.
너무 아파서 못참을때는 할아버지께 100원짜리하나 타서는 약국도 아닌 약방이라는 곳을 가서
백반물을 솜방망이에 찍어 아픈상처에 바르고 올정도 였으니 어느정도통증인지 조금은 알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일주일 이주일 갈 상처가 이틀정도 지나면 하얗게 아물기 시작했으니 살이 타는 고통을 느낄정도지만
오죽했으면 어린게 그런결정을 했을까 싶다.

그 과외선생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는데 태어나서 한번도 보지 못한 정말  다쓰러져가는 초가삼간집에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와 우리집에 종업원 언니야들의 삯빨래를 하는 어머니와 두아들이 있었다.
그중 큰아들의 바로 나의 과외선생님이었다.

전교 일등을 하며 아마도 그 어머니에 유일한 희망이었을 그 과외선생님은 내 기억에도 참 따뜻하고
착한 그런 오빠였던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내탓인지 누구탓인지 모르겠지만 하필 식사시간에 그집에 있게된 것이다.
나는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런 밥상을..
꽁보리밥에 고추장 그리고 풋고추 그게 밥상의 전부였는데 나를 의식했는지 밥 먹으라면서 내밥까지 떠놓고
밥상을 차려와 나도 그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게 된것이다. 조금은 민망해하시는 그분들때문에 눈치도 보이고...
언젠가 글에도 쓴적이 있지만 나의 어렸을때의 모습은 트리플 A형 그자체라 어디서 나서거나 내주장을 말하거나
하지를 못하는 아이였다.
아프기도 아팠고 그 밥상이 당황스럽고 그때 혼식을 장려하던때인데 늘 쌀밥을 싸가 다른아이들과 섞어서
검사를 맞거나 정말 보리를 중간중간 박아서 검사를 맞거나 했었지 이런 쌀한톨 안섞인 꽁보리밥에 풋고추는
그때까지 먹어보지도 않았던 음식인게다.

어찌어찌 식사를 끝냈을까...그집식구들 민망해할까봐 아무내색못하고 억지로 밥을 먹은 나는
이건 정말 꾸역꾸역 쑤셔넣었다는게 정답일거다. 억지로 그야말고 어거지로 구겨넣은 나는 결국
그집식구들이 눈치못채게 화장실에가서 다 토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엉엉울었다는...ㅠㅠ
그 기억때문일까 나는 30대 중반이넘어서야 고추를 손으로 잡고 된장이나 고추장을 찍어먹는 행위를 처음해 본듯하다.
사실 지금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빨간매운음식 매니아인 내가 청양고추의 애린맛만큼은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집에 돌아온 나는 할머니에게 당분간 과외를 가지 말라며 그집 아버지가 병들어 식구들에게
폐만 되니 석유를 뿌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을 질러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불쌍한 아버지보다 그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세간살이마저 잃어버린 나의 불쌍한 과외선생님을
비롯한 그 모자들이 너무너무 걱정스러웠다.
결국 그 세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떤 인연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몇년후 나의 과외선생님은 사범대학을 들어갔다며 우리집에 인사를 왔고 또 몇년후 둘째 오빠는 감리교신학교를
들어갔다며 우리집에 인사를 왔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기뻐했고 나도 너무 기뻤던 그들의 작은 성공이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로 뿌듯했다.
그 어머니의 노고가 그 어린나이에도 대단한 모정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한 광수오빠, 광철이 오빠, 점잖고 의젖한 내 어린 과외선생님과 늘 장난끼가 가득했던
둘째오빠 모두 지금은 존경받는 선생님과 목사님이 되어 있고 또한 누군가의 듣든한 아버지가 되어있으리라..

조금은 안좋은 기억으로 지금도 꽁보리밥에 풋고추는 내게 그립고 반가운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할 나의 어린 과외선생님과 지독한 가난에 대한 한조각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같이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그들이 오늘은 갑자기 궁금하고 그립기도 하다.